전국교수노동조합 교수논평

'무해하다'는 착각권력이 무기가 되지 않는 생태계를 위하여

최근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 양성과정에 참여했다.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궤적은 꽤 굴곡지다. 90년대 페미니즘은 진보적 여성을 의미하는 상징과도 같았으나, 이제는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반발을 더 자주 마주하는 시대가 됐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맞추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오랜 시간 기울기를 선점해 온 이들에게는 자신의 몫을 빼앗기는 억울한 차별로 감각되는 까닭이다. 페미니즘을 향한 세상의 오해와 반발이 거세지는데, 학창 시절만 해도 큰 관심 없던 페미니즘이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 내 삶을 해석하는 주요 렌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제도권에 진입해 살아남는 과정에서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견고한 남성 중심의 미세 권력과 부딪혀야 했던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신임 교수 시절, 대학에서 겪은 여러 부당함 이면에는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여성'이라는 위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젊은 여성 교수는 손쉽게 통제하고 가르치려 들 수 있는 만만한 존재로 취급되곤 했다. 여성교수회를 제안하자, 대학 사회에 여성 차별이 어디 있느냐며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답변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사석에서 과거에 겪은 서로의 어려움을 소환할 때면, 그 부당함의 배경에는 어김없이 '젊은, 여성'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연대하는 일이 마냥 '옳고 선하다'는 낭만적 믿음 또한, 연구자 단체 활동 제안을 거절한 후배의 얘기를 들으며 흔들렸다. 품이 드는 외부 시민 활동이나 실무는 여성 연구자에게 제안하면서, 정작 학문적 생존이 걸린 교원 임용 자리에는 남성 후배나 제자를 밀어주는 위선적 관행을 그녀는 지적했다. 진보와 연대를 외치는 연구자들조차 시민 활동은 여성과, 자원을 나누고 일할 동료로는 남성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2024년 기준 4년제 대학 전임교원의 여성 비율은 27.9%(한국연구재단, 2024년 「대학연구활동실태조사 분석보고서」), 국립대로 좁히면 21.4%(교육부, 「2024년도 국립대학 양성평등 조치계획 추진실적」 보도자료)로 교수 5명 중 1명꼴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과거 남성 중심이던 시절의 임용 결과가 누적된 '시차적 현상'일 뿐이라 반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 박사학위 취득자가 2024년 42.3%(한국직업능력연구원, 「국내신규박사학위취득자조사(2024)」), 2025년 43.5%(한국교육개발원 국가교육통계센터, 「국내신규박사학위취득자 조사(2025년)」)까지 올랐음에도, 임용률은 물론 대학 내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총장·처장 등 핵심 보직자의 여성 비율이 13.7%(교육부, 「2024년도 국립대학 양성평등 조치계획 추진실적」 보도자료)로 급락하는 현실은 과거의 누적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세대 교체의 시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학계의 '유리천장'이자 남성 연대의 공고함을 드러내는 수치다. 진보 지식인 사회 역시 이 기울어진 구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미세한 배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그 억압이 조직의 화합이나 학문적 보편성, 혹은 진보적 대의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때다. 기울어진 토양 위에서는 성별에 따라 요구되는 암묵적인 역할의 경계가 존재한다. 여성 교원에게는 묵묵히 학과의 궂은일을 챙기고 갈등을 다독이는 조력자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정작 주요한 의사결정 과정이나 부당함에 정당하게 목소리 내는 여성에게는 기가 세고 예민하다는 낙인을 찍기 일쑤다. 여성학이나 노동 의제를 다루는 연구는 유행 타는 지엽적 분야로 폄훼하면서, 주류적인 연구만을 보편적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성 비위에 휩싸인 동료를 과거의 업적이나 조직의 안위를 핑계로 비호하고, 도리어 문제를 제기한 이들을 폄훼하는 일마저 진보적 지식인 사회 내에서 공공연히 벌어진다.

성별이든, 나이든, 직급이든 자신이 획득한 조건이 타인을 억누르는 무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성별이든, 나이든, 직급이든 자신이 획득한 조건이 타인을 억누르는 무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성평등이란, 형식적인 제도의 완성을 넘어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의 미세한 권력관계에 의문부호를 달아보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조심스러워 '여성학'이라 에둘러 말하던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페미니스트가 되려 한다. 더 이상 '나는 무해하다'며 안주하지 않고, 익숙한 관성에 제동을 걸 참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낡은 농담에 동조하며 웃어주지 않고, 당연하게 요구되는 부당한 감정 노동을 단호히 거절하는 몽니도 부려 보겠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동등한 연구자임에도 성별에 따라 다르게 할당되는 보이지 않는 굴레를 내 몫의 일상에서부터 거부해 보겠다는 의미다.

공고한 생태계를 바꾸는 일은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갖추더라도, 그 공간을 채우는 우리 각자의 치열한 자각과 일상적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힘은 언제든 무기가 되어 타인을 겨누게 된다. 일상의 관성적인 흐름을 조금씩 끊어내는 개입들이 모일 때, 비로소 가장자리에 선 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틈이 열릴 것이다. 살아남아 선배가 된 나와 당신이 가진 연차와 자원이, 누군가를 베거나 미묘하게 억압하는 무기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는 완벽한 세계가 어느 날 마법처럼 도래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무해하다는 착각을 버리고 기꺼이 불편해지기를 선택하는 이 지루한 실천만이 견고한 구조에 진짜 균열을 낼 수 있다.(끝)

김명하
논평인: 김명하
현) 안산대학교 교수
전국교수노동조합 교육시민연대실장